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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전략 경영
작성일 : 09-08-26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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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갑주교수
 조회 : 6,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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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를 기회로 만든 세계의 기업가 10인 >
헨리포드에서 정주영까지
저자: 문원택(조지워싱턴 대 경영학 박사. 서강대 경영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이준호(경영컨설턴트. 현대경제사회연구원 전문 연구위원. 산업연구원 책임연구원), 김원석(서강대 경영학 박사. 협성대학교 경상학부 조교수)
헨리 포드 2세
헨리 포드 2세가 1945년 사장으로 취임한 후 포드자동차의 재기와 도약을 성공시킨 이야기는 경영혁신의 고전 사례로 유명하다. 포드자동차의 창업자 헨리 포드는 기술자 출신의 영웅적 기업가로 당대 세계 제일의 기업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내기업 내 마음대로’라는 지나친 독재로써 말 잘 듣고 아부하는 사람들만 득세하는 친위 경영체제를 만들었고, 창업공신들과 우수한 인재들을 경쟁사에게 내주면서 포드사를 삼류회사로 전락시키고 후계자인 아들까지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게 했다. 아들 에드셀이 죽고 헨리 포드가 사장으로 복귀하자 사내에 사조직을 만들어 아부와 부패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키워오던 베넷 일당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헨리 포드는 아들 에드셀에게 협조했던 사람, 후계자로서 자신과 경쟁자가 될 만한 사람들은 모두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포드자동차의 승계를 둘러싸고 암투가 시작되어 창업가 중심의 아부하는 사람들과 포드 가족 간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포드 2세는 제대하자 마자 포드자동차에 입사해 아무런 직책도 없이 아버지가 사용하던 방을 물려 받았다. 그는 마음 속으로는 할아버지와 베넷을 증오하면서도 자신을 경계하지 않도록 기회가 있을 때마다 베넷과 그의 주변 인물들을 가까이 하면서 복잡한 회사의 권력구조와 운영실태를 파악했다. 그 결과 유능한 인재가 끊임없이 이탈하고, 부정 취업자의 증가, 회사 재산의 유출과 착복 등 부정행위, 회계 및 재무관리의 부정, 사내 권력장악을 위한 부정인사 및 사조직의 강화 등이 회사를 좀먹고 있으며, 유능하고 양심적인 인재가 조직적으로 숙청당함으로써 부실기업이 되어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사실을 할아버지에게 모두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헨리포드는 오히려 베넷을 두둔하면서 손자에게 그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했다. 헨리포드 2세는 회사 내에서 리더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계획을 과감히 추진하기 시작했다.
첫째, 베넷이 결정권이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수석부사장직을 만들어 공식적으로 경영조직의 2인자 자리를 차지했다. 둘째, 2차 대전 후 새 시대에 걸맞는 새 자동차를 만들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셋째, 할아버지를 찾아가 자신의 승낙 없이는 아무도 해고할 수 없다는 서류에 결재해 달라고 단호히 요청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이것이 회사에서 베넷을 몰아내려는 의도임을 눈치채고 그 요청을 거부했다. 바로 그때 포드 집안의 여자들이 헨리 포드에게 완강히 맞서기 시작했다. 할머니 클라라는 남편에게 “회사에서 헨리 포드 2세의 요청을 거부하는 것은 가족간의 결속을 무너뜨리는 일이에요”라고 단호히 말했다. 에드셀의 부인 엘리너도 “만일 제 아들이 회사를 맡을 수 없다면 저는 에드셀에게서 상속받은 주식(전체 지분의 41%)을 모두 팔아 버리겠습니다”라고 거들었다. 이에 헨리 포드는 손자에게 사장직을 물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헨리 포드 2세는 이후 34년 동안 온 인생을 다 바쳐 재창업에 성공했다. 사장 취임 시 생산 50만대, 종업원 16만명이었던 포드 사를 퇴직 시 생산 650만대에 종업원 51만8천명의 세계적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든 배우려는 진지한 자세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는 전국에 있는 딜러들을 방문하여 인간적인 만남을 가지면서 포드자동차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자신의 구상을 설명했다. 전문가들에서 자문을 받았다. 당시 가장 경쟁력이 있고 모범적인 기업이었던 GM을 배웠고 우수한 전문가들을 영입하여 그들과 협동했다. 측근들에게 자신의 능력 부족을 확실히 인정하면서 기업 역사상 최대의 도박 중 하나로 여겨지는 모험을 단행했는데, 그것은 1946년 신동들이라고 불리는 10명의 미육군항공대 출신의 젊은 장교들을 영입한 일이었다. 이들 중에서 2명의 사장과 6명의 부사장이 배출되었다. 1960년 대 초 사장이 된 막나마라는 뒷날 케네디 정부의 국방장관으로 스카우트되었다. 이 신동들이 진단한 결과를 듣고 헨리 포드 2세는 회사의 상황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GM의 회장, 슬론의 후계자이자 GM 방계회사의 사장이었던 브리치를 영입했다. 브리치는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헨리 포드 2세를 비롯하여 모든 경영진에게 드러커의 GM 연구서이자 새로운 회계기법, 분권화 이론 등이 쓰여진 <대기업론>을 필독서로 읽게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책만으로는 경영진의 사고가 바뀌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GM 사람들을 대거 스카우트하여 회사를 변화시켜나가기로 결정했다. 최고경영자를 제외하고 GM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150여명의 중간관리자를 영입했다. 1920년대에 보잘 것 없던 GM을 일류회사로 만든 대담한 조직개혁안들을 20년이 지난 뒤에야 포드사는 받아 들임으로써 GM에 대응할 경쟁체제를 갖추었다. 1950년 대에 포드는 재기에 성공했다. 업계 3위에 허덕이던 포드는 연 이익 2억불을 올림으로써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점은 사내에 회사를 되살려 나갈 아이디어맨이나 카리스마적인 존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 헨리 포드2세의 눈에 띈 사람이 당시 36세의 엔지니어 아이아코카였다. 그는 아이아코카에게 포드사업부의 총책임을 맡겼다. 아아아코카는 무스탕을 개발하여 첫해에만 48만대를 팔아 GM과 다시 동등한 경쟁을 벌일 수 있는 위치로 복구되었다.
1976년 57세를 맞은 헨리 포드2세는 자신이 영원히 포드자동차를 경영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족 중에는 마땅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전문경영인에게 회장직을 물려 주기로 결심했다. 1980년 3월 칼드웰을 회장으로 지명한 뒤 과감하게 물러났다. 헨리 포드2세가 내린 결단의 효과는 몇 년 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포드는 GM과 거의 같은 판매량을 기록하여 헨리 포드2세의 소망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헨리 포드2세의 재창업 사례는 다음과 같은 원칙들을 보여 준다.
1. 새 시대에 맞추어가는 지도자의 철저한 자기 변신과 개발
2. 기업조직의 개혁
3. 사내기업가정신의 강조
4. 새로운 기업문화 창조
5. 직무과정의 혁신
혼다 소이치로
혼다는 1946년 10월에 혼다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처음에는 12명의 종업원에게 월급도 제대로 못 줄 정도로 어려웠다. 전쟁이 끝나자 혼다는 쓸모 없게 된 육군 무선기용 소형엔진을 구입해 자전거에 부착해 팔았다. 이 자전거 오토바이는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혼다는 일찌감치 국제화 전략을 추구했다. 혼다는 창업 후 10년 만인 1959년에 혼다 아메리카를 설립했다. 도요타나 닛산에 비해 후발 주자였던 혼다는 일본에서는 발 붙일 곳이 없었으므로 해외 진출을 선택했다. GM, 포드 등 현지의 대형 메이커들이 버티고 있긴 해도 미국은 일본처럼 유통구조가 복잡하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 정부가 도와주는 입장이었다. 혼다는 철저한 현지화 전략으로 성공했다. 혼다아메리카와 부품업체 간, 그리고 부품업체와 부품업체 간의 이동거리를 2시간 이내로 단축시킴으로써 부품의 적시 공급과 적시 생산이 가능하도록 했고 부품업체를 자주 방문하여 품질관리를 수행했으며 장기계약으로 부품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즉, 미국 현지에서 부품 조달, 제품 디자인, 개발, 생산, 판매, 시장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일본혼다와 독립된 경영을 함으로써 현지시장에 적합한 의사결정을 신속히 하고 현지 소비자들의 욕구를 파악하여 재빨리 대응했다. 혼다는 1982년 11월부터 어코드의 생산을 시작했다. 어코드는 1989년에는 미국에서 95만2천대로 가장 많이 팔린 승용차가 되었다.
1991년 혼다 소이치로가 85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미국 언론들은 일본보다도 더 애석해하며 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기술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혼다는 학력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특히 일을 하는 능력보다 학벌??다. 혼다는 연공서열을 중요시 하지 않았다. 실적에 따른 승진제도를 채택했고 나이에 관계없이 태도와 정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꾸준한 도전을 통해 남들이 못하는 일들을 해내는 모험가적 기업가였고 실패에 굴하지 않고 끝내 성공을 쟁취해 내는 노력가였다. 또한 기술자로서 창조와 혁신을 수행한 혁신가였다. 혼다는 스스로 물러날 때를 알고 이를 과감히 실행에 옮겼다.
빌게이츠
어린 시절부터 컴퓨터 시대가 열리리라고 예견한 게이츠는 1972년 17세에 최초로 교통량 분석자료 생산회사 Traf-O-Data를 만들었다. 물론 이 사업에서 실패하긴 했지만 기업가의 자질을 일찍부터 보여준 것이다. 1974년 하버드 대학 2학년 때 빌 게이츠는 MITS사의 신제품 Altair 8800 소형 컴퓨터 광고를 보고 앨런과 함께 BASIC 프로그램을 만들어냈다. 이 프로그램이 상품 가치가 있다고 예측한 두 사람은 학업을 중단하고 마이크로소프트 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게이츠는 19세, 앨런은 21세였다. 창업 초기에는 어느 회사나 몹시 어렵고 회사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 사건이 있게 마련이다. 어려운 고비에서 마이크로소프트를 구해준 것은 IBM이었다. 이로 인해 IBM은 강적을 키운 꼴이 되고 말았다. 당시 IBM은 애플사를 견제하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사에게 퍼스널 컴퓨터 용 운용체제 개발을 의뢰했던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DOS는 퍼스널 컴퓨터용 운용체제 시장을 석권했다.
1995년에는 윈도우 95가 출시되었다. 윈도우 95는 기존의 윈도우 3.1의 성능을 크게 개선해서 초보자들이 더 쉽고, 더 빠르고, 더 재미있게 사용하도록 해준다는 특성 말고는 IBM이나 애플의 운영체제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게이츠는 전세계 280여 개 이상의 퍼스널 컴퓨터 제작 업체들이 윈도우 95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고 장담하면서 시장 점유율 80%를 확보한다는 목표 아래 사전 광고 비용으로 무려 3억불을 투자했다. 이 요란스러운 광고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대대적인 출시 전략이었다. 결국 윈도우 95는 퍼스널 컴퓨터 시장에서 대성공을 거두면서 시장을 석권했다.
빌 게이츠 자신을 말을 인용하면 그가 성공한 것은 자신에게 미래를 예측하는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기업가로서의 성공요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남달리 미래지향적인 특질이 있었다. 단기적 비전과 장기적 꿈을 잘 조화시켰고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2. 리더십과 전문적 하이테크 지식을 갖춘 전략가였다. 그는 나이를 먹으면 머리가 굳어져 버리기 때문에 나이 먹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 말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우수기업 만들기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반관료적인 팀 문화를 육성했다. 사내 기업가 정신이 충만한 기업 문화를 만들었다.
2. 중점지향 집중개발 전략을 추구했다.
3. 시장 및 고객에 대해 민감했고 지속적으로 개선을 추구했다.
4. 혁신제일주의를 핵심으로 상품개발의 신속성을 추구했다.
이병철
이병철이 사업가로 성공한 요인은 첫째, 사업보국이라는 높은 이상과 꿈을 가지고 그 시대에 곧 바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사업을 선정했고, 둘째, 이를 과감히 사업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고 셋째, 이를 실현하기 위한 인재 제일주의와 합리주의적 기업경영을 실현한 것이다.
그는 20세에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2학기 말에 심한 각혈을 하여 학업을 포기한 채 귀향하고 말았다. 26세가 되기까지 5년간은 방황의 연속이었다. 26세가 된 어느 날, 그는 달빛에 비친 잠든 어린 자식들의 얼굴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문득 무위도식하는 한심스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무엇이든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첫 번째 사업은 정미소와 운수업 그리고 농지 매입이었고 대구에서는 무역업을 했다. 해방이 되자 양조업을 벌이는 한편 서울로 진출하여 본격적인 무역업에 뛰어 들었다. 이것이 삼성물산의 시작이다.
“사업을 운영할 때는 첫째, 국내외 정세 변동을 정확하게 꿰뚫어 봐야 하고, 둘째, 무모한 과용을 버리고 자기 능력과 한계를 냉철하게 판단해야 하며, 셋째, 요행을 바라는 투기를 피하고, 넷째, 직관력을 중시하는 한편 항상 실패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면서 대세가 기울어 실패했다고 판단되면 깨끗이 미련을 버리고 차선을 택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호암이 창업자로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적 사업에 대규모 시설로 승부를 건 과감성과 독특한 리더십이 제조업과 잘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호암은 사업을 시작할 때 철저한 시장조사와 함께 정세 분석을 시행한다. 100% 완벽한 정보를 얻을 때까지는 결코 서두르지 않고 ‘돌다리도 두드려 보는 경영으로 유명하다. 즉 오랜 시간을 두고 치밀하게 사업타당성을 분석함으로써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요인을 발견하고 구체적인 방법까지 정확히 그려내며, 가동 후에 세워질 조직, 인원, 영업 시스템, 인사제도, 교육훈련 등 경영 전반에 걸쳐 완벽한 자료를 준비한다. 그렇게 때문에 일단 사업 대상이 결정되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키고, 중도에 문제가 생겨도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다. 그는 사업추진에서 가장 위험한 일은 준비 부족과 추진 도중에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본인 스스로 철저하게 연구를 해야 했으므로 틈날 때마다 독서를 하고,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또한 주변에 사업 구상을 토의할 원로들과 자문단을 배치하고 방대한 비서실 등 스태프 조직을 두어 한치도 빈틈이 없도록 했다.
호암이 참여한 업종에서 선두주자가 되기 위해 즐겨 사용한 방법은 품질은 최고급으로 하고 철저하게 가격인하를 단행하는 것이었다. 규모의 경제에 대한 호암의 생각은 절대적이었다. 한국비료를 건설할 때도 세계 최대의 규모였고 가격경쟁을 위해 공장건설 기간을 최대한 단축하여 건설비용을 줄이게 했고 가격 전략에서는 경쟁자가 따라 오기 힘든 가격 조건을 만들어 냈다.
호암은 사업의 성패에는 사람의 능력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다.
“기업이란 의욕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제 아무리 수익성이 좋은 사업이라도 그것을 발전시키고 확장시켜 나갈 능력이 없다면 성공하지 못한다. 시기와 사람 그리고 자금, 이 세가지가 함께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호암의 자신의 시간 중 80%를 인재양성에 쏟았다. 우수 인재 채용을 위해 1957년 공채제도를 도입했고 교육을 장기투자로 생각해 막대한 예산을 사용했다. 1983년 삼성의 1인당 사원교육비는 일본의 2배, 미국의 3배, 유럽의 4배나 되었다. 능력에 따른 대우와 철저한 신상필벌로 기업을 몰락시키는 주요 요인인 기업 내부의 온정주의와 권력투쟁을 사전에 방지했다.
삼성의 경영 이념: 사업보국, 인재 제일, 합리 추구
삼성 정신:
1. 새로운 것을 탐구하고 개척한다. (창조정신)
2. 진실되고 바르게 행동한다. (도덕정신)
3. 모든 면에서 제일이 된다. (제일정신)
4. 확실하고 완벽하게 일한다. (완전정신)
5. 서로를 존중하고 돕는다. (공존정신)
한국비료 사건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호암은 장남에게 그룹 전체의 운영을 맡겼다. 이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그러나 기업경영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삼성의 진로에 일대 전기가 될 새로운 사업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1년 넘게 세계를 돌며 정보를 입수하고 유명기업들을 방문했다. 이때 새로운 사업의 결정적 실마리를 제공한 사람이 산요전기의 이우에 도시오 회장이었다. 이우에 회장은 호암을 도쿄 전자 단지로 안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자사업이야말로 모래를 원료로 한 실리콘 칩에서 TV에 이르기까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부가가치 99%의 창조산업입니다.”
호암은 1969년 삼성전자를 설립했다. 그는 향후 기업의 흥망이 컴퓨터와 반도체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이 분야의 투자는 기존사업과 달리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위험이 있지만 그래도 이 길을 택하지 않으면 일류기업으로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반도체 사업은 소극적으로 접근했다가는 시장 진입조차 할 수 없는??냐 오직 한 가지 길만 있는 도박에 주사위를 던졌다. 1984년 9월 삼성은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64KD 램을 생산했고 오늘날 세계 제일의 반도체 회사가 되었다.
정주영
그는 무에서 시작하였으나 앞선 생각과 상식을 초월하는 파괴적 경영을 통해 건설, 조선, 자동차, 전자사업 등에서 누구도 생각지 못한 기적을 만들어냈다. 1970년대 초 오일쇼크로 국민경제가 파탄 직전에 몰렸을 때 건설로 중동의 사막에 진출하여 위기를 넘겼고 모두가 무모하다고 비난하는 가운데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세계 제일의 조선소와 G7 이외의 나라 중에 처음으로 세계적 규모의 자동차 공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일본 재계에서는 한국의 경쟁상대 중 가장 두려운 존재로 정주영을 지목했다.
그는 20세 때 아주 우연한 기회에 복흥상회라는 쌀도매상의 점원이 되었다. 주인 할머니는 아산이 명필인데다 매일 아침 가게 앞을 깨끗이 청소하는 부지런한 모습을 보고 배달점원으로 쓰기가 아까워 경리를 맡겼다. 아산은 경리를 맡자마자 주인이 재고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가게 안을 정리정돈하고 부기학원에서 배운 복식부기를 이용하여 받을 돈과 줄 돈을 금방 알아보게끔 장부정리를 해놓았다. 주인은 점점 더 그를 신임하여 나중에는 주인을 대신해서 거래처의 주문을 받으러 다닐 정도가 되었다. 밤이면 다른 점원들은 짜장면 등을 시켜 먹으며 놀곤 했지만, 그는 혼자 와세다 대학에서 나온 통신강의록으로 사법시험준비를 하거나 틈틈이 신소설들을 읽으면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점원 생활을 3년쯤 했을 때 주인은 병이 나서 가게를 꾸려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아산은 주인의 배려로 쌀가게를 물려 받았다. 그의 나이 23세였다. 그러나 2년쯤 뒤에 식량 배급제로 인해 쌀가게는 문을 닫아야만 했다.
그는 새로운 사업을 물색하던 중 당시 서울에서 가장 큰 자동차 서비스 업체인 경성서비스에 있는 기술자를 알게 되었다. 아산은 그와 함께 수리업체를 인수하여 동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장은 한 달도 못되어 화재로 전소하고 빚만 남게 되었다. 그는 사업을 시작할 때 거액의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 반드시 성공해서 돈을 갚을 테니 다시 한번 꾸어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어렵게 자금을 빌려 아도 서비스라는 공장을 만들었으나 무허가였기 때문에 경찰서에서 수시로 단속을 나왔다. 아무런 배경도 돈도 없는 아산은 매일 담당 경찰관을 찾아가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단속을 면하게 해달라고 비는 수밖에 없었다. 담당 경관은 위법인 줄 알지만 날마다 찾아와서 사정하는 아산을 외면할 수 없어 단속을 면하게 해주었고 오히려 사업이 잘되도록 조언까지 해주었다.
당시 서울 시내를 달리는 자동차라야 겨우 수십대에 불과했다. 이들은 차가 고장나면 꼼짝하지 못했다. 다른 자동차 공장에서는 빨리 고칠 수 있는 것도 수리비를 많이 받기 위해 시간을 끌했다. 아산은 자동차를 가진 사람들에겐 특히 시간이 소중할 터이니 빨리 고쳐주기만 한다면 많은 주문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공장에서는 열흘쯤 걸리는 일을 3일만에 고쳐주면서 수리비를 높게 받는 방법을 썼다. 주문이 밀어 닥치기 시작했고 큰 돈을 벌게 되었다. 그 때 아산은 사업에서 성공하려면 절대로 남들이 하는 평범한 방법으로는 안되며, 새로운 방법을 통해 고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짚어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산은 해방이 되자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걸고 자동차수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미군 병기창의 엔진교체 작업을 청부받아 일제 트럭을 개조해서 팔았는데 해방 후 자동차 수가 크게 증가하면서 사업이 날로 번창해 처음에 30명이었던 직원이 1년 사이 80명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실로 우연한 기회에 아산은 토건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 자동차 수리 대금을 받으러 관청에 갔다가 그는 같은 시간을 일하고도 토건업자들이 자기보다 몇 십 배나 더 많은 돈을 받아가는 것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어 토건업을 해보겠다고 결심했다. 주변에서는 모두 반대했다. 그 분야에 경험도 전혀 없는데다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으므로 망하기 십상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아산은 막노동이라면 해볼 만큼 해보았고 토건업이나 자동차수리업이나 크게 다를 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 자동차 공업소 안에 현대 토건사를 세우고 직원 10명으로 시작했다. 공사는 거의 미군이 발주하는 것이었는데 미군은 당시 토건업체 단체인 조선토건협회가 추천하는 15개의 업자에게만 공사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아산은 공사가 늘어나 이들 업체만으로는 일하기 곤란해진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공사를 따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6.25가 터졌다. 가족과 재산은 서울에 남겨둔 채 당시 동아일보 기자여서 공산당의 표적이 될지 모를 아우 정인영을 데리고 피난 길에 올랐다. 한편 영어에 능통했던 동생 정인영은 미군공병대에 통역으로 취직했다. 어느 날 정인영은 미군 공병대에서 숙소를 지을 건설업자를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받고 바로 현대건설을 소개했다. 미군들이 부산으로 계속 상륙해 들어 왔기 때문에 일꾼들이 밤을 새워가면 숙소를 지어도 당해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 때 큰 돈을 벌었다. 1952년 1월에 유엔군 사절단이 부산 유엔군 묘지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미군은 사절단에게 황량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으니 돈이 얼마가 들든 묘지를 푸른 잔디로 입혀달라는 특별주문을 해왔다. 사절단이 머무르는 시간은 아주 짧았으므로 어쨌든 푸르게만 보이면 된다고 생각한 아산은 낙동강변의 보리밭을 통째로 사들어 묘지에 옮겨 심게 했다. 이 창의적인 아이디어에 감탄한 미군은 그 후 주요 공사를 모두 아산에게 맡겼다. 이때부터 현대건설이 제시하는 가격이 바로 공사금액이 되었고 아산은 미군의 공사라면 가리지 않고 맡았다. 그는 이때 위험이 큰 공사일수록 이익도 크다는 것을 깨우쳤다. 휴전이 되자 아산은 미군의 공사는 조만간 끝날 것으로 내다보고 정부가 시작하는 긴급복구공사에 뛰어 들었다. 이 때 아산이 거의 재기 불가능할 정도로 크게 손해를 본 사건이 일어 났는데 대구와 거창 간의 교량복구 사업인 고령교 공사였다. 좀더 큰 공사를 맡기 위해 교량의 특허권자인 당시 내무부 토목국장을 고문으로 영입하여 고령교 공사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공사금액은 그때까지 현대건설이 수주한 중 최대규모였고 그 해 수주한 다른 모든 공사를 합한 것보다 큰 액수였다. 교량 건설 경험이 있는 엘리트 사원들도 여러 명 스카우트했다. 그러나 공사는 처음부터 난항이었다. 노임과 자재값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아 예상했던 단가로는 공사를 진행시킬 수가 없었다. 당시 건설회사에는 장비가 거의 없었는데 공사를 시작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교각 하나를 박아 넣지 못하고 있었다. 경험 부족과 장비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수주한 것이 잘못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회사 자금이 바닥나자 공사장에서는 밀린 노임 지불하라고 아우성치고 채권자들은 빌려준돈 내노라고 진을 치고 살았다. 아산은 긴급가족회의를 소집했다. 가족들은 모두 이쯤에서 그만 두어야 한다고 말했고 회사 간부들은 간판을 내리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아산은 사업가의 첫째 재산은 신용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생들과 매제 김영주 등이 집을 팔고 아산도 가족이 살집만 남기고 모든 재산을 팔아 자금을 마련해서 공사를 끝냈다. 공사 금액은 5천5백만환인데 적자액은 6천5백만환이었다. 미군공사, 운수업 등으로 모았던 모든 재산을 한 순간의 실수로 날려버린 40세의 아산은 ‘이것은 시련이지 실패는 아니다. 내가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결코 실패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담담하게 가졌다.
아산이 고령교 공사에서 실패한 후 맨 먼저 한일은 중기사무소를 만들고 건설장비를 대폭 보강시킨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막대한 적자를 무릅쓰고 공사를 끝낸 점을 높이 평가하여 현대건설을 다른 업체와 다르게 대우하기 시작했다. 이후 정부의 대규모공사들을 맡으면서 회사는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고령교 공사후 5년만에 국내 도급순위 1위에 올랐다.
1966년 1차 경제개발계획이 완료되자 경부고속도록 건설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엄청난 공사비 때문에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태국에서 고속도로 건설을 하고 있는 아산을 만나 공사비용을 산출해보라고 말했다. 보통 1년씩 걸리는 이 일을 아산은 소형비행기를 타고 수 차례 왕복하면서 한 달 만에 해냈다. 현대건설은 전체 고속도로 구간 중 1/3을 맡았다. 현대가 제안한 공사비는 최저치를 기준으로 한 것이어서 자칫하면 큰 손해를 볼 수 잇는 위험천만한 사업이었다. 기업으로서는 어떻게든 이익을 내는 것이 급선무였으므로 아산은 공사기간 단축에 승부를 걸었다. 흔히 공기를 단축하면 부실공사가 되기 십상이지만, 장비공급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건실한 공사를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 아산의 지론이었다. 그는 공기 단축을 위해 공사의 기계화를 서둘렀고 예상대로 공기 내에 완료할 수 있었다. 고속도로의 성공으로 아산은 정부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다. 그 후 정부에서 시작하는 발전소, 댐, 각종 플랜트 공사 등 대규모 국토개발사업들을 수행했다.
1966년 어느 날, 한국 진출을 겨냥한 포드자동차가 국내 시장조사를 마치고 합작대상업체들과 면담한 후 돌아갔다. 당시 건설업을 하고 있던 아산은 면담대상에 끼지 못했다. 아산은 미국에 나가 있던 아우 정인영에게 포드자동차와 접촉하도록 지시했고 정인영은 유창한 영어실력을 발휘하여 포드가 한국측 면담 대상에 아산을 끼워주도록 손을 썼다. 1968년 포드자동차와 기술제휴로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간 아산은 코티나를 처음 조립생산했다. 1972년부터 아산은 포드측과 50대 50의 합작회사를 만들어 모든 부품을 국산으로 대체하고 포드의 판매망을 통해 현대측이 생산한 승용차를 수출하기를 희망했다. 포드측은 현대측의 제안을 거부했다. 협상이 결렬되자 아산은 독자경영의 길을 택했다. 독자노선으로 갈 경우 수입차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5만대의 생산능력과 무려 1억불의 투자가 필요했다. 때문에 이 계획은 회사 내 중역들로부터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당시 현대건설의 연간 공사액이 50억원 정도였고 국내승용차 총생산대수가 2만대도 되지 않는 형편이었으므로 그들의 반대는 당연했다. 게다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추진된 조선사업을 위해 대규모 차관을 들여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산은 일본이 한 일을 왜 우리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도 일본을 충분히 따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속도로가 놓이고 산업화가 가속되어 국민소득이 오르면 자동차 수요가 엄청나게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막대한 자원 마련 문제는 건설업 특유의 사업방식처럼 생산을 시작하여 돈이 들어오면 차관으로 들여올 공장건설 비용을 충분히 갚아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아산을 향해 GM의 수석부사장 밴지는 코웃음을 치며 “현대가 고유 모델로 수출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현대자동차는 이런 비웃음을 물리치고 1974년 독자적으로 개발한 포니와 포니쿠페를 출품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16번째로 고유 모델을 갖는 자동차 생산국이 되었다. 국내에서는 승용차 시장의 44%를 차지하면서 국내 최고의 자동차회사가 되었다.
현대건설이 외국에서 벌이는 공사는 문화, 언어 등의 문제로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아산은 국내의 풍부한 노동력과 건설 경험을 살리면서 국내에서 달러를 벌 수 있는 사업을 궁리 끝에 찾아낸 것이 조선사업이었다. 아산은 선박도 건설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배는 정유공장의 탱크처럼 구부려서 용접하고, 속의 기계는 건물을 지을 때처럼 구입해서 조립하며, 나머지 기계들도 도면대로 끼워 넣으면 된다고 보았다. 문제는 조선소 건설 자금을 어디에서 조달해 올 것인가였다. 필요한 자금은 외자만 4,300만 달러로 정부 경제발전 예산 1,137억원과 비교해 볼 때 엄청난 액수였다. 아산의 계획은 누가 보아도 무모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산은 아주 조그만 실마리만 있어도 이것을 바탕으로 점점 크게 키우면 얼마든지 사업에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의 논리대로 결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1971년 아산은 런던에 지점을 세우고 돈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녔다. 그러나 국제금융계에서는 누구 하나 응해주지 않았다. 그는 만일 영국 바클레이스 은행만 공략하면 다른 은행도 움직일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우선 영국의 유명 조선기술회사인 애플도어사를 찾아간 현대건설의 국내외 공사실적과 조선을 시작할 충분한 기술능력을 밝히면서 설득했다. 아산의 끈질긴 설득 끝에 마침내 애플도어 사가 현대의 조선공업에 대한 기술능력을 입증해주자, 바클레이스 은행은 현대의 조선사업에 대한 타당성을 심사하기로 했다. 아산은 드디어 상대편 해외담당 부총재와 마주 앉았다. 부총재는 앉자마자 아산에게 물었다.
“당신 전공이 무엇이요? 경영학이오, 이공학이오?"
아산은 이렇게 반문했다.
“부총재, 내 사업계획서를 검토해 보았소?”
“물론 면밀히 검토했지요. 아주 훌륭한 사업계획서더군요.”
“그것이 내 전공이요. 사실 어제 옥스포드 대학에 이 계획서를 들고 가서 학위를 달라고 했더니 두말없이 경제학 박사학위를 내줍디다.”
그러자 좌중이 웃음바다가 되고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정회장 당신의 전공은 오히려 유머같군요. 우리 은행은 당신의 사업계획서를 수출보험국에 보내기로 했고. 행운을 빌겠소.”
이제 진짜 문제는 수출보험국이었다. 수출보험국 총재를 찾아가니 총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회장 당신이 제출한 사업계획서에는 이의가 업소. 또 바클레이스 은행에서도 당신들이 원리금을 갚을 능력이 있다고 하니 그 점도 이의가 없소. 그런데 말이오, 내가 선주라면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유명조선소에 주문하지 경험도 없고 배를 외상으로 살 수도 없는 당신에게 주문하겠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소?”
총재의 논리정연한 말에 아산은 할 말이 없었다. 이제 아산은 선주를 잡지 못하면 차관 교섭을 포기해야 할 형편에 놓였다. 한 척에 수천만 달러나 하는 배를 어디서 갑자기 주문 받는단 말인가? 선주를 물색하기 위해 가진 것이라고는 조선 후보지인 울산의 백사장을 찍은 사진과, 영국 스콧리스고 조선소에서 빌린 26만톤 유조선 도면 한 장이 전부였다. 그런데 어느 날 애플도어사의 톰바슨 회장이 그리스 선주 리바노스씨가 싼 배를 구하러 다닌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아산을 만난 리바노스씨는 유조선 도면을 내려다보면 이렇게 말했다.
“정회장, 내가 도박을 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소만, 이 상담을 성사시키기로 했소. 배 2척, 3,095만 달러, 2년 반 후에 인도해 주시오. 만일 조건을 이행치 않을 때는 당신 말대로 원리금을 찾아갈 것이오.”
리바노스가 제시한 금액은 당시 시세보다 14% 낮은 가격이었다. 드디어 1972년 100만톤규모의 세계 최대의 조선소 건설이 시작되었다. 한쪽에서는 조선소를 짓고 한쪽에서는 배를 건조하는 기상천외한 작업이 진행되었다. 부족한 장비는 현장에서 직접 만들어 사용하였다. 마침내 배는 온갖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완성되었다. 현대 조선소는 1970년 대 중반부터 오일 운반용 초대형 유조선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대호황을 누리는 달러 박스가 되었다.
1975년 조선소 공사를 하던 중 아산은 사우디 정부가 주베일 항에 10억 달러 규모의 대규모 산업항을 건설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 금액은 우리나라 1년 예산의 20%가 되는 천문학적 수치였다. 육상과 해상에 걸친 세계에서 유례없는 대종합공사였다. 사우디 정부는 영국 기술용역회사인 윌리엄 할크로 사에 기본 설계도를 맡기면서 입찰에 참여할 자격을 갖춘 10개 시공사를 추천해 달라고 의뢰했다. 입찰은 극비리에 이루어져 이미 9개의 세계적 건설업체들이 준비 중이었고 마지막 티켓 한 장만 남아 있었다. 할크로 사를 움직일 방법이 필요했던 현대 런던지사는 세계 최대의 조선소를 영국의 도움으로 최단시일 내에 완공한 실적 등을 내보이며 조선소 건설로 인연을 맺은 애플도어 사와 바클레이스 은행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현대건설은 마지막 입찰 자격을 따낼 수 있었다. 견적 결과 12억 달러가 나왔으나 10억 달러 이하를 써내는 회사는 없을 것으로 보고 8억7천만 달러로 입찰하기로 확정했다. 입찰단 중 한 사람이었던 전갑원 상무는 이 금액이 지나치게 낮다고 하면서 최소한 9억3천불은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산은 기능공들이 외화를 벌고 국산자재도 내다 팔수 있는데다?격에 집착하지 말라고 전상무를 설득했다. 현대는 아산의 말에 완강히 반대하던 전상무를 입찰실에 들여보냈는데 투찰을 마치고 나온 전상무의 얼굴은 왠지 밝지 않았다. 아산은 “왜그래? 내가 쓰라는 대로 썼지?"라고 물었다. 전상무는 얼굴이 벌게지면서 “아닙니다. 8억7천만불보다 6천만불 더많은 9억3천불을 쎴습니다”라고 답했다. 입찰 결과를 보러 들어갔다가 나온 전상무의 얼굴은 백지장이 되었다. 9억4백만불을 쓴 미국의 브라운앤드류사가 낙찰되었던 것이다. 전상무는 한쪽 구석에 가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기적이 일어 났다. 앤드류사가 최저 금액을 써냈지만 그것은 해양유조선 정박시설만을 위한 것이어서 무효가 되고 다음으로 낮은 가격을 써낸 현대로 낙찰되었다는 최종 결과가 발표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전상무는 전무로 승진되면서 완전히 영웅이 되었다. 다른 입찰사들은 “현대가 객기부리다 사우디 앞바다에 침몰하고 말 것이다.”고들 했다. 그러나 아산은 공기, 비용 등을 고려해 철구조물과 쇠파일등은 울산의 현대조선소에서 미리 만들어 바지선에 싣고 1만2천 킬로 미터 떨어진 주베일 항으로 운반한 후 현장에서 조립했다. 아산의 아이디어는 적중했고 공사는 사우디정부의 요구인 44개월 보다 8개월 일찍 완료되었다. 현대는 주베일 공사에서 막대한 이익을 올렸고 그 이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수주하게 되는 중동 건설 물량으로 획기적 성장을 이루어냈다.
아산의 기업가로서의 성공요인: 첫째, 아산은 운을 믿지 않았으며, 운은 때라고 보았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면 좋은 기회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직원들에게도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는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조선소, 자동차, 주베일 공사 등에서 이룬 성공은 아산이 아니면 생각도 해낼 수 없는 기상천외한 방법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항상 담담한 마음으로 일을 하면 총명해지고 지혜로워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낙관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다.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이 탁월했으며, 남들이 기피하는 위험도가 높은 사업에 승부를 걸었다. 둘째, 일단 도전한 사업에는 반드시 경쟁자를 이길 만한 숨겨진 길이 있다고 보고 이를 발견하는 데 모든 지혜를 동원했다. 즉 ‘상식을 초월하는 곳, 논리와 합리가 벗어나는 그곳에 또 하나의 이치가 있다고 믿고 이를 과감하게 실천에 옮겼다. 셋째, 사업가의 생명은 신용이라고 보고 이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넷째, 그는 능력있는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여 일을 맡김으로써 이들이 신명을 다해 일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공사를 하다가 아이디어가 참신하면 비록 경험이 없는 젊은 사람의 것이라도 실패를 무릅쓰고 과감히 수용하여 즉시 실천해서 공사를 성공리에 끝내기도 했다. 아산은 소수정예를 강조했고, 누구에게나 과감하게 일을 맡겼다. 다섯째, 철저한 현장경영과 스피드 경영을 하였다. 형식에 얽메이지 않았던 그는 서류가 아니라 사람을 보고 결재했다. 그리고 결재서류에 절대로 도장이 3개 이상 넘지 못하도록 하는 스피드 경영을 실시했다. 여섯째, 직원들과의 소탈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권위나 허례허식을 싫어했다. 공장을 건설할 때는 으레 저녁에 근로자들의 합숙소를 찾아가 같이 막걸리를 즐기거나 밤 늦도록 술집에서 함께 마시기도 했다. 그는 작은 것이라도 철저히 절약하는 것을 생활화했다. 담배나 커피는 입에 대지 않았다.
현대의 사훈: 근면, 검소, 친애
현대의 3대 정신: 창조적 예지, 적극적 의지, 강인한 추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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